그래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써먹”으려 애써요. 눈앞에 닥친 죽음과, 발밑에 도사리는 불안과, 세상을 향한 분노를 애써 외면하며. (중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가 나돌고, 길거리에는 신종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싣기 위한 구급차와 사망자를 나르는 운구차가 끊임없이 지나다니고, 물자가 모자라서 커피에 각설탕 하나 넣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두 젊은 연인은 데이트를 합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데이트를 하죠.
_18페이지
릴리안이 남편과 함께 짧은 휴가를 떠난 동안, 프랜시스는 저택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릴리안과 나누었던 연정이 모두 그토록 덧없는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비참한 환멸에 잠깁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낡은 일상은 변함없이 견고하기만 하고, 프랜시스 자신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이 저택의 일상에 안주해야 할 운명이고, 릴리안과의 만남은 그저 짧은 일탈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_43페이지
당신은 내가 당신을 해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나요?
당신이 내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신기한 생각을 했어요. 당신은 평생 단 한 번도 당신의 잠든 얼굴을 본 적이 없겠구나. 지금의 이 얼굴은 오로지 나만 볼 수 있는 것이겠지. 세상과의 접속을 끊고 의식의 수면 아래에 잠겨든 여리고 투명한 맨얼굴, 가지런히 감긴 눈꺼풀, 고른 숨소리, 새벽의 빛이 귓바퀴와 턱에 조용히 내려앉는 방식 같은 것을. 이 평화로운 정경은 당신이 만드는 것인데도, 정작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을 테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불현듯 외로워져요.
_68페이지
놀랍지 않나요. 내가 당신을 위한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요. 내 복종을 당신이 받아들일 때, 당신의 존재 전체가 내게 매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_112페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 굴욕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어떻게든 말하려고, 피해를 알리려고, 악인을 고발하려고, 쓰치에게 손을 내밀어주려고, 쓰치의 단절된 삶을 재생시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쓰치에게, 린이한에게 사랑은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린이한은 그 폭력과 맞서 싸우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_21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