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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6·25전쟁 폐허 속에서 희망꽃을 피워낸 리차드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과 인류애~ 전쟁속 의인 리차드 위트컴 바로알기~

좋은책 찾아~ 2023. 8. 8.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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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유엔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전쟁 여파와 잦은 화재로 폐허가 된 부산을 재건하는 데 온몸을 던졌던 리차드 위트컴. 도시가 폐허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찾고 최선을 해결책을 찾아낸 위트컴은, 부산 시민을 위해서 라면 장군으로서의 체면을 구기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메리놀·침례·성분도·복음·독일적십자병원 건립 지원, 이재민을 위한 후생주택 건립, 보육원과 요양원 건립, 부산대 장전캠퍼스 부지 마련 등 수많은 선행을 쌓았던 장군. 의리 앞에서 자신을 불사르는 ‘부산사나이’다운 면모를 보였던 리차드 위트컴을, 이제는 부산시민이 기억하고 재조명하며 의리를 지킬 차례다.- 5p

위트컴 장군이 부산시민에게 베푼 선행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위트컴 장군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물자를 이재민에게 나눠줬다는 이유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그는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War is not done with sword nor the rifle. Genuine triumph is for the shake of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박수와 함께 많은 구호금까지 받고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 24p

위트컴 장군은 주어진 미군대한원조(AFAK) 기금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차원을 넘어 부산 시민을 위한 일을 발 벗고 찾아다녔다. 기금이 부족하면 그는 예하 부대원의 월급 1%를 병원 신축 기금으로 헌금하도록 하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미군 부대 간 후원 결연 등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 33p

박주홍 교수는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발휘한 위트컴 장군의 리더십을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한다. 박 교수는 “도시가폐허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걱정하거나 관망하기보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찾고, 이들을 통합해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해결책에 집중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축적된 장군의 모든 경험과 지식이 총동원됐다. 위트컴의 리더십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 41p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는 두 사람의 인생 못지않게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6·25전쟁 이후 전쟁 고아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다가 1964년 결혼했다. 3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었다. -50p

위트컴 장군의 선행에 도움을 받은 부산 시민이 부산역전 대화재 발생 1주년을 맞아 1954년 11월 그를 기리며 세운 공덕비는 그동안 사진만 있을 뿐 비석 존재 여부와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덕비 위치를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임종태 문성인쇄사(중구 중앙동 4가) 대표는 “현재 부산도시철도 1호선 중앙역 14번 출구 인근 외환은행과 정석빌딩 사이, 당시 전차역 전차선 안쪽 역전파출소 인근에 위트컴 장군 공덕비가 있었다”고 비석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 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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