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새나라를 세우고는 명나라에게 ‘조선’과 ‘화령’ 중 하나를 국호로 선택해달라고 사신을 보냅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낙점하였고 이 때부터 단군조선은 고조선이라 불리게 됩니다. 화령은 1960년 다시 한 번 역사에 등장합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윤보선 전 대통령은 경무대였던 대통령 집무실의 이름을 변경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새로 변경할 이름으로 ‘화령대’와 ‘청와대’의 두 가지 안을 제시됩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본관의 청기와 지붕에서 의미를 딴 ‘청와대’를 선택하였고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이전한 이후에도 여전히 청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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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도 건설을 주도하고 결정한 것도 정도전입니다. 궁과 성벽의 배치, 설계부터 완공까지, 경복궁의 전각이나 문 등의 이름도 대부분 정도전이 정했습니다. 또한 국정 제도 전반을 개혁하고, 사병을 폐지하고 의흥삼군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통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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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과 함께 정몽주를 숙청했으며, 공양왕을 협박한 것도 이방과입니다. 또한 그는 이성계 가문의 친위대인 가별초의 수장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방원이라고 해도 형을 제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방과는 왕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방원이 즉위를 재촉하자 ‘네가 해라’며 사양하지만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방과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주위에서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니 세제로 책봉해야 한다고 하자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라며 그냥 밀어붙입니다. 왕이 된 후에도 정치는 모두 이방원에게 맡기고 자신은 격구나 사냥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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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4대 왕이 죽자 신하들은 문이라는 무난한 묘호를 올립니다. 그러자 왕이 된 아들이 우리 아버지의 업적이 겨우 문이라는 묘호 밖에 못받냐며 세로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의 제 4대 왕은 세종이 됩니다. 그리고 문이라는 묘호는 아들이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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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경연을 오히려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세종대왕 스스로가 학문의 깊이가 너무 깊다보니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됩니다. 세종의 경우 즉위기간 동안 1898회나 경연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신하들이 경연하기가 싫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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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도성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 등 요충지를 확보한 뒤 이미 장악한 경복궁으로 들어갑니다. 궁에서 수양대군은 동부승지 최항을 만났고, 조정 신료들의 명부를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수양대군의 손을 거쳐 한명회에게 넘어간 명부는 그대로 살생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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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많은 희생자 중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이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육신전》이라는 소설 때문입니다.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서 죽은 여섯 신하라는 의미의 사육신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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