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이 항상 저를 슬프게 하죠.” 노인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내가 갑자기 흥분하며 말했다. “아기나 다름없는 어린아이를 혹독한 현실로 내몰 생각을 하는 것이 항상 저를 슬프게 합니다. 하늘이 어린아이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 자신감과 순수함을 빼앗고, 어른의 기쁨을 알기도 전에 어른의 슬픔을 먼저 경험하도록 강요하는 겁니다.”-p20(1권)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음흉하고 교활했고, 입과 턱은 거친 굵은 수염으로 가시가 돋친 듯했으며, 피부색은 한 번도 세수를 안 했거나 아파 보이는 그런 종류의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의 기이한 표정에 보탬이 된 것은 섬뜩한 미소였는데, 기분이 좋거나 만족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라 습관처럼 입가에 굳어진 듯했고, 그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흉측한 송곳니가 입 밖으로 드러나 개가 침을 흘리는 모습 같았다.-p43(1권)
대체로 양심은 탄력적이고 유연한 물건이라 많이 늘어나도 잘 견디고 다양한 상황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플라넬 조끼처럼 하나씩 사려 깊게 벗거나 심지어 적절한 때에 한꺼번에 벗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걸치고 편의에 따라 벗어 던지는 사람도 있다. 후자가 요즘 유행하는 가장 멋지고 편리한 처신법이다.-p94(1권)
상점은 완전히 버려져 마치 수개월 동안 그래온 것처럼 먼지투성이에다 우중충했다. 녹슨 통자물쇠가 문에 그대로 매달렸고, 색 바랜 블라인드와 커튼 끝자락이 반쯤 열린 위층 창문에 부딪혀 쓸쓸하게 나부꼈고, 창문 아래 닫힌 덧문의 뒤틀린 구멍은 방의 어둠으로 검게 막혀 있었다. 키트가 항상 지켜보던 창문의 유리 일부가 그날 아침 서둘러 짐을 빼는 바람에 깨져 있어 그 방은 어느 때보다 적막하고 우울해 보였다.-p187(1권)
펀치 인형극의 몇 가지 다른 버전에는 한 신사가 기르는 개-현대의 혁신 물-가 등장하는데, 그 개가 바로 항상 토비라고 불리는 개다. 토비는 새끼일 때 다른 신사에게 도둑맞고,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자신만만한 영웅 펀치가 속아 토비를 사게 된다. 하지만 토비는 옛 주인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며 새 주인들을 차갑게 대한다. 펀치가 담배를 피워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옛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더 강하게 드러내며 펀치의 코를 공격해 격렬하게 비틀어버린다.-p244(1권)
이 밀랍 인형들은 눈을 크게 떴고,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고, 팔과 다리의 근육이 강하게 발달했고,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소 불안하게 서 있었고, 전시실을 뛰어다니는 무례한 대중과 떨어지도록 가슴 높이에 진홍색 줄이 쳐졌다. 모든 밀랍 신사들은 새가슴에다 짙푸른 수염을 달았고, 모든 밀랍 숙녀들은 경이로운 몸매였다.-p370(1권)
키트는 그 놀라운 광경 속의 변화무쌍한 배우들이 지난밤에도 같은 연극을 했고, 비록 그는 그곳에 없지만, 그날 밤에도 다음 날에도 같은 연극을 할 것이고, 앞으로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같은 연극이 반복되리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어제와 오늘의 차이점이다. 우리는 모두 연극을 보러 가는 사람이거나 연극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이다.-p35(2권)
“불은 내게 책과 같아.” 남자가 말했다. “읽는 법을 배운 유일한 책. 불은 내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줘. 또 불은 음악이기도 해. 어떤 소음 속에서도 불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지. 그리고 그 함성 속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어. 불은 자신의 그림들도 가지고 있단다. 내가 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낯선 얼굴과 다양한 모습을 찾아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불은 내 추억이기도 해. 내 인생 전체를 보여주거든.”-p94(2권)
이 변화무쌍한 줄-오직 우연만이 튕길 수 있다-은 가장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호소에도 말없이 무감각하다 아주 무심한 감동에 반응해 소리를 낸다. 가장 무감각하거나 유치한 마음속에는 좀처럼 기교로도 이끌 수 없는, 또는 기술로도 도울 수 없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반향이 있다. 이 반향은 거대한 진실이 지금껏 그랬듯이 우연히, 그리고 진리를 발견할 사람이 가장 담담한 목적을 가질 때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p230(2권)
“나는 걸친 옷 따위는 보지 않아. 마음을 보지. 옷의 체크무늬는 새장의 철조망과 같아. 하지만 마음은 그 새장 속의 새란다. 아! 얼마나 많은 새가 새장 속에 갇혀 털갈이하고 새장의 철조망 사이로 부리를 내밀어 인간을 쪼는지!”-p253(2권)
“하늘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녀의 어린 영혼이 날개를 단 하늘나라와 비교해 보세요. 이 침대 위에서 간곡한 기도로 그녀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해도 우리 중 누가 그런 기도를 할까요!”-p463(2권)